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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폐암 말기란다.

미국에 사는 빌리는 중국에 있는 할머니의 시한부 소식을 듣고 이곳저곳 흩어져 살던 가족들과 모두 모여 할머니를 위한 결혼식에 참석한다. 여기엔 할머니가 모르는 두 가지 비밀이 있는데 하나는 이 결혼식이 가짜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할머니가 폐암 말기라는 사실이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유조차 납득하지 못한 빌리는 중국에 있는 내내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빌리의 가족들은 할머니가 시한부라는 사실을 아주 철저히 숨기려고 하는 데다 심지어는 제법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까지 한다.

만약 내가 빌리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시골 할머니 댁에 갔다가 그들을 두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늘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들과 영영 이별해야 한다니. 그 질문은 자연히 거짓말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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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시한부임을 숨기는 가족들의 의도는 뭘까. 논쟁을 피하기 위한 수단일까 혹은 걱정을 방지하고싶은 마음일까? 내내 담담해보이던 큰아버지는 가짜 결혼식 축사때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리고 내내 할머니를 향한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워하던 빌리는 그 모습을 보며 오히려 멍한 표정을 짓는다. 이 모든 거짓말들이 할머니를 속임으로써 얻는 편안함, 혹은 현실 도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할머니에게까지 전달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타지에서 친구가 없을까 걱정하는 할머니에게 모르는 사람을 친구라고 소개하는 것과 할머니의 시한부를 숨기는 가족들. 무게는 다를지언정 그 이유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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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어웰>은 거짓말이라는 관행의 근원으로 파고들고자 한다. 빌리와 가족들 중 누구의 의견이 더 옳은지를 따지는 것은 거짓말을 가려내는 것 만큼이나 쉽지 않다. 이 영화는 거짓말이 타인에게 슬픔을 전달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아마 개인주의적 관점의 사회에서 살아온 빌리가 이해하기 힘든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내적 갈등을 빌리 역의 아콰피나가 깊이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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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언젠가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온다. 막을 수도, 늦출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힘들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더욱 그렇다. 동서양과 관점의 차이에 관계없는 사실이다. <페어웰> 속 할머니도 어쩌면 본인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방식이야 어찌됐든 이들의 선택은 상대방이 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배려의 마음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