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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고 축축한 날에는 가끔 고담 시가 생각난다. 영화 <배트맨>의 주요 배경인 고담 시는 어둡고 축축하며 스산한 도시다. 눈부신 발전과 화려한 빌딩 뒤에 감춰진 고담시의 어두운 이면. 약자를 노리는 빌런들과 부패한 경찰들이 득실거리는 고담 시에서는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밤이 되면 부랑자들과 범죄자들이 거리를 장악한다.

낮이나 밤이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도시,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잔인한 이 도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일 수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최소한의 정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이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잘생긴 얼굴에 매력적인 목소리, 심지어 어마어마한 재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어둠 속에서 등장하는, 과묵하고 진중하지만 얼굴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그 남자. 바로 배트맨이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 덕분에 대중들에게는 <다크 나이트>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배트맨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배트맨 비긴즈> 또한 참 잘 만들어진 영화다. <배트맨 비긴즈>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배트맨이 어떻게, 왜 배트맨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히어로 ‘배트맨’의 탄생 비화인 셈이다. 고담 시를 고속 성장으로 이끈 고담 시의 영웅 웨인 가(家). 여타 부자들과는 다르게 명예를 중시하고 서민들을 존중하는 가문의 철학으로 인해 웨인 가는 고담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렇게 부와 명예를 쌓던 웨인가의 어린 아들 ‘브루스 웨인’은 어느 날 부모님과 함께 극장에서 나오던 길에 부모님이 괴한에게 피살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이후 죄책감과 분노에 휩싸인 채 고담 시를 떠나 세상을 유랑하게 된다. 성인이 된 브루스 웨인이 누구를 만나 어떻게 배트맨으로서 살아가게 되었는지가 영화의 주된 스토리지만, 영화 <배트맨 비긴즈>가 상징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강자가 약자의 편에 서는 과정과 이유다. 그리고 배트맨이 승리하리라 믿는 시민들의 순수하고도 절박한 믿음 또한 주목해야 할 요소다. “가끔은 사람들에게 믿음에 대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라는 배트맨의 말처럼 고담 시민들에게 배트맨은 최후의 정의이며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낮보다는 밤이, 햇살보다는 비가 어울리는 고담 시에서 부와 권력을 가지고 기꺼이 약자를 위한 옳은 일을 행하는 것. 명예를 중시하는 웨인 가의 철학과 ‘내가 하는 행동이 나를 정의한다’고 믿는 그의 신념이 바로 그가 고담 시의 진정한 히어로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