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모성애는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자신이 배 아파 아이를 낳은 엄마라면 모두가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가 되는 것일까? 그렇게 따지면 아이를 직접 낳지 않은 아빠가 가진 부성애는 진정한 사랑이 맞는 걸까?
이 영화는 모성애가 결여된 엄마와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보여준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에바는 자신이 낳은 아이인 케빈에게 성장과정 내내 적대적이고 가혹한 태도를 보여준다. 에바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케빈이 우는 모습을 보고 달래주기는커녕 공사장 소리로 아이의 울음을 덮어버리는 행동을 하는가 하면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네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케빈은 남들처럼 똑 같은 발달을 겪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 상황에서 동생인 실리아가 태어나고 에바는 케빈으로부터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이는 남편인 프랭클린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영화를 끝까지 보면 결국 케빈은 평생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물론 케빈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큰 아이 모두가 케빈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과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아이가 생긴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또한 나는 이 영화에서 에바-케빈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오로지 방관자로서의 역할을 한 아빠 ‘프랭클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아동이 정상적으로 발달하는 데 과연 엄마만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영화에서 아빠에 행동과 역할에 대해서는 엄마인 에바만큼 자세히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 것일지 몰라도 아빠가 아이가 성장하는 데에 있어 매우 방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에바의 적절치 못한 모성애만이 케빈을 정상 발달을 할 수 없게 망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랭클린은 육아 과정에서 참여하지 않은 채 에바의 행동을 이해해 주지 않고 질책하며 심지어 다그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아이는 엄마에 대해 증오를 보이고 아빠는 그저 방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바에게 모성애를 강요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다소 폭력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빠의 방관적인 태도가 에바의 행동에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동에 발달과정에는 단순히 엄마만이 아닌 부모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