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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게 쓰는 편지마저 ‘외주’주는 고도의 테크놀로지 시대. 감정을 다루는 일은 지나치게 번거롭고 성가신 것으로 치부하는 차가운 세상에서, 테오도르는 대필 작가로 생활한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삶에서 사랑과 우정, 후회와 연민 등 가장 연약하고 보드라운 부분을 골라내어 글로 적는 그의 직업은 섬세함과 예민함을 요한다.

그러나 결혼생활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데에 미숙하다는 이유로 아내 캐서린에게 이혼을 요구당하고, 그의 앞에 나타난 운영체제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OS인 사만다와의 사랑은 캐서린과의 사랑과 달리 어렵고 복잡하지 않다. 다른 방해물 없이 오직 둘로만 이루어진 관계. 오직 둘에게만 집중하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에서, 테오도르는 사랑과 안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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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Her>은 ‘인간과 A.I가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라는 보편적 질문에 대해, 나름의 힌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영역을 넓혀, 인간에게 사랑이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인간과 OS의 사랑은 가능하나 지속 불가능하다. 인간과 OS의 사랑은 이상적일 수 있으나 온전하지 못하다.

인간은 따라 잡을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하는 OS와의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에 생기는 무한한 공백을 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이로부터 오는 상실감은 오로지 인간이 감내할 몫이다. 사만다와의 관계가 오롯이 일대일의 관계가 아니었으며, 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깨닫게 된 테오도르의 상실감은 그에게 이입했던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을 무겁게 한다.

사만다와 이별 후 테오도르는 비슷한 아픔을 겪은 친구 에이미를 찾아간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는 캐서린에게 진심을 담은 편지를 쓴다. 돌고 돌아 결국 인간이다. 줄곧 다른 이들의 편지를 대필하던 테오도르가 온전히 그의 진심을 담은 편지를 전한 상대가 캐서린이었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비슷한 속도로 성장하고 비슷한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과 인간, 서로뿐이다.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만이 인간을 온전히 위로할 수 있다. 영화를 가득 채우는 다운톤의 색감은 테오도르와 사만다 사이의 불완전함, 그리고 인간 고유의 결핍을 대변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