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요일’이다. 그리고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이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를 요일 이름으로 부른다. 어릴 적 사고로 같은 몸이지만 각 요일 별 7명의 자아로 살고 있다. 그중 화요일은 (실제 우리의 화요일 모습과 비슷하게) 가장 조용하고 취미도 딱히 없는 무료한 삶을 산다. 일어나서 월요일이 저지른 난장판을 치우고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는다. 집에 와선 혼자 탁구를 친다. 다른 요일과의 혼돈 방지를 위해 오후 11시에는 잠에 든다. 그렇게 짧은 하루가 끝나고 일주일의 긴 밤이 찾아온다.
화요일은 다른 요일들의 삶에 대한 기억이 없다. 눈을 뜨면 어제에서 그다음 주 화요일이다. 그래서 ‘화요일’에겐 1년이 52일이다. 하루의 일과를 적은 글과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장소에 포스트잇을 붙여 서로 소통한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눈을 떴더니 오늘이 ‘수요일’이다. 수요일이 사라졌다.
‘나’를 연기하는 나카무라 토모야는 작품마다 다른 분위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이다. <수요일이 사라졌다>를 보기 전까지 2번 그의 연기를 봤었다. <나기의 휴식>에서는 나른 섹시미를, <이 사랑 데워드릴까요>에선 무심하면서 챙겨주는 츤데레의 모습으로 다른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가지고 있는 목소리 톤도 안정적이고 앞머리의 유무 등의 작은 변화에 따라서 이미지가 확 바뀐다. 그래서 나카무라 토모야의 7개의 자아를 연기가 기대됐다.
보통 해리성 인격장애를 다룬 영화는 자극적이거나 스릴러인 경우가 많다. 여러 개의 자아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선과 악이 모두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수요일이 사라졌다>는 그런 요소가 적다.
전반적으로 조용한 화요일의 자아가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후반에 들어서면서 다른 자아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기존의 해리성 인격장애를 다룬 영화들과는 다른 잔잔한 분위기가 극을 이끈다.
7개의 자아가 나타난 이유를 크게 부각하지도 않는다.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 인격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이나 각각의 이유에 초점이 맞춰져있지 않다. 같은 몸이지만 7개의 나는 모두 그 요일에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다. 화요일도 자신이 살아가는 날이 수요일까지 늘어났다는 것에 처음엔 기뻐한다. 화요일에 열지 않는 도서관에 갈 수 있고 수요일에 흘러나오는 거리의 음악을 들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수요일이 만들어온 수요일의 일상들이 자신에게 온다고 그것이 과연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인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합쳐지면 수요일의 인격은 어디로 가게 된 것일까? 그 인격들이 없어지고 자신이 그 인격을 대신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감독은 다양한 자아 중 하나의 진짜 나를 찾아가는 것보다 각각의 자아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주인공 ‘나’의 모습이 이전에 봐왔던 해리성 인격장애의 영화들과의 큰 차이로 다가왔고 그래서 신선했다.
우리는 과연 영화의 ‘나’와 다르게 하나의 자아로 살고 있을까? ‘나’가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은 맞지만, 우리도 사실 다양한 자아들로 살고 있기도 하다. 요일 별로 혹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같은 하루더라도 시간 별로 우리는 달라지기도 한다. 다양한 나, 즉 페르소나들을 갖고 살아가는 게 적합해진 세상이 되었기도 하다.
영화의 초반에 7개의 요일들은 같은 몸에서 살아가기 위한 꼭 필요한 말들만 서로 전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다다라선 요일들은 활발하게 소통하면서 친한 친구들처럼 대화한다. (마지막의 귀여운 엔딩크레딧은 필수다!) 화요일이 겪었던 혼란처럼 우리도 나의 다양하고 다른 모습들 간에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요일들처럼 우리도 가지고 있는 다양한 ‘나’들을 모두 존중하고 서로 소통시키면 어떨까? 그 다양한 모습들도 모두 ‘나’니까 🤩